개인전 <영광의 상처를 찾아>_작업노트, 2019

 

갈 곳을 잃은 시선이 그의 얼룩덜룩한 팔에 멈춰섰다. 그는 일부러 딱지를 떼고 상처가 더욱 덧나게 만들었다고 했다. 크고 멋진 흉터를 갖고 싶었단다. 어쩌다 다쳤는지를 물어 보았던가, 아니면 그때 들은 대답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어쨌거나 보기에 썩 인상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래전 일이다.
누구나 최소 한두 개 쯤은 가지고 있는 흉터 얘기다. 그러니까 살갗에 남은 것이든 가슴 깊이 아로새겨진 것이든, 맨살에 당연히 쓰렸을 그 스크래치 말이다. 모두가 안다. 서른을 훌쩍 넘겨도 통증은 통증이요, 고생은 그냥 고생이다. 그 ‘아닌척’을 얼마나 잘 하는지가 성숙한 사람의 척도라면 남은 삶이 너무 재미 없을 것 같다.
때때로 ‘어른 되기’란 그저 감각이 무뎌지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주체성을 소거하는 집단 최면처럼 느껴진다. 물론 크고 작은 사회가 형성된 이래로 순수하게 독립적인 감정을, 생각을 소유 하기 어려운 게 맞다. 우리는 눈치와 배려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의식하고 있으며, 집단적 합의에 어련히 침묵하는 경우 또한 허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랜 시간에 걸쳐 혼재된 자의와 타의를 단편적인 대립항으로 구분하는 대신, 나와 남이 아닌 것, 다소 말장난 같은 이 차이를 기준으로 하나의 대상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이중성을 띄곤 하는지 통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현상에 해석을 덧씌우거나 가치의 수준을 서열화하는 시스템상의 편의 중 기어이 살아남은 각종 질서 및 양식들을 작업에 차용해 왔다. 바꿔 말하면 다양한 삶의 형태를 획일화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만족을 추구하는(그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민주적 약속을 가리킨다. 사실 역사를 통틀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삶의 불확실성을 덜어 주는 약속의 단맛을 보았다. 오늘날 갑자기 발생한 유별난 일이 아닌 셈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지점은 그것이 시대의 변화 속도를 따라 오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불편함에 익숙해지기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는 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이해관계 속에서 우리의 최선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올려보자.
그리하여 현재[가까운 미래]까지 작업의 지향점은 쉽게 감지되지 않는 미세 균열을 들쑤시고 드러냄으로써 공론의 장을 마련 하는 것이다. 의구심에 자리가 필요하다면 감히 내가 내어드리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다만 허공을 맴도는 원리/원칙을 지양하며, 일상과 끈적하게 얽혀있고 언제나 비슷한 자리에 머물러 왔던 소재와 태도를 활용한다. 마치 메추리알로 바위치기 같은 도발로, 못된 장난을 통해서 말이다.
아주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런 작품/전시가 세상을 바꿀만한 반향을 일으키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원망의 모든 화살을 외부 세계로 돌리는 것 또한 아니다. 하찮은 자기 반성을 촉매로 나는 한때 자신의 것이었을 경험을 영영 잃지는 말자고, 대의를 조금 거스르더라도 ‘이정도 삐딱한게 뭐 어때!’라는 말을 건내고자 한다. 끝으로, 이 이야기의 진짜 제목은 이것이다.

“영광의 상처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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